지난 6월18일부터 21일까지 아시아비교철학학회에서 주관하는 학술발표회에 다녀왔습니다. Society for Asia and Comparative Philosophy는 1966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미국철학학회에서 창립모임을 논의하면서 설립됩니다. 유서 깊은 학회라고 봅니다.
미래학을 전공하는 정치학과 대학원생이 철학학회 컨퍼런스에 참가하게 된 이유는 한 친구 덕분인데, 아쉽게도 참가를 권유한 이 친구의 논문은 발표용으로 채택되지 못했고, 제 논문만 채택됐습니다. 물론 이 친구, 샌프란시스코 가서 만나 회포를 풀었습니다만.
철학학회 생각보다 재미있더군요. 특히 인도, 중국 등 아시아의 사상과 미국의 사상 비교 등은 흥미롭습디다. 제대로 알아 듣지 못해서 그렇지만...
학술대회는 해마다 캘리포니아 아실로마(Asilomar)라는 해변가 마을에서 열립니다. 북 서부 캘리포니아 몬트레이는 하와이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만큼 아름다운 곳입니다. 포도밭과 해변이 잘 어울린다고 할까요...
(제 숙소 뒤에 보이는 소나무 정원. 앞으로는 바다가 펼쳐져 있지요.)
(숙소가 국립공원 안에 있어 동물들이 자유롭게 뛰어다닙니다. 다람쥐도 보고...)
이번 학회의 주제는 "철학과 우리의 미래(Philosophy and Our Common Future)"라는 것이었고, 사실 이 주제 때문에, 주제넘게도 철학학회 학술대회에 참가하게 됐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합리적인 사고와 미학적 사고가 미래를 어떻게 다르게 보는지 탐구하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참가 후, 느낀 점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는데요.
1. 철학학회에서 발표된 논문들은 주로 과거의 이미지가 어떻게 현재를 재구성하는지, 사회를 변화시키는지 탐구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과거는 살아있다!" 하는 것이 철학자들이 반복해서 하고 싶은 말이라는 것이죠.
2. 이런 점에서 비교철학이든 비교문학이든, 경계해야 할 것은 동서양의 사상을 비교하면서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 취사선택한다는 점입니다. 자칫 당대의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누구는 이런 말을 했다....지금도 그 말은 유효하다...그래서 내 주장은 역사적이고, 현재적이다...는 식의 주장은 견강부회로 비춰질 수도 있습니다.
3. 반면 내 주장의 근원을 밝혀내고 그 근원에서 어떻게 발전해 내 이론으로 변형되었는가를 밝히자면 당연 과거로의 여행은 필요합니다. 그 때 왜 그 학자가 이런 이론을 내놓았을까, 내가 관찰하는 지금의 세계와 어떻게 다른가, 이런 차이 속에서 나는 어떤 포지션을 찾아야 하는가...는 당연히 물어야하고 찾아야 하는 질문일 겁니다.
4. 다만, 과거의 이미지가 현재를 바꾼다는 생각은 일면적인 시각이라는 점이죠.
미래학 1세대 존 맥헤일(John McHale)은 1969년에 펴낸 책, "The Future of the Future"에서 이런 선문답 같은 말을 합니다.
The future of the past is in the future.
The future of the present is in the past.
The future of the future is in the present.
이렇게 본다면 철학자들의 미래를 보는 시각은 두 번째에 해당됩니다.
나머지 두 시각에 대한 탐구는 하지 않는 셈이죠.
5. 철학자들이 본격적으로 환경과 생태, 에너지 문제에 관심을 갖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선현들의 지혜를 빌린 이번 학회는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많은 학자들이 미국의 일방적인 독주를 경계했고, 자국의 이해관계만 다루는 이기적인 측면도 반성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학자들의 양심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도 되었습니다.
6. 이번 학술대회 참가의 최대 성과는...저로선 정화열 교수님을 만났다는 점일 겁니다.
현상학의 대가, 하이데거와 메를로 퐁티의 철학으로 들어가 '몸의 정치학(Body of Politics)'으로 나와 이 분야를 개척하신 분. 한국에도 많은 제자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모라비언 대학의 명예교수로 남아 계시지만, 세계 각국을 다니시며 강의하고 있습니다.
(정화열 교수님은 3박4일동안 식사 시간 때면 내가 있는 테이블로 오셔서 함께 시간을 보내주셨다. 말씀하시기 보다는 주로 듣는 것에 열중하셨고....오른쪽 구석에 뒤통수 보이는 녀석은 제 아들입니다. 저는 아내와 아들과 함께 참가했습니다. 다른 학자들도 가족들 많이 데리고 왔더군요.)
제가 미래학의 주요 임무 중 하나로 꼽는 것이 지역특성에 맞는 번역인데. 이 부분에서 정 교수님의 Transversality라는 개념은 새로운 지평을 열어줍니다. 한국의 학자들은 이 단어를 '횡단적 연계성'이라고 번역하고, 그 의미를 '어떤 사상을 확장, 변형, 개선시키는 것'이라는 정 교수님의 말씀에서 찾습니다. 학회에서 말씀하신 정교수님에 따르면, 유럽중심의 계몽주의 사상에서 나온 Universality의 독선적이고, 대안을 허락하지 않으며, 지역의 문화적 사회적 특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고의 대안으로 Transversality를 내놓게 됐다고 합니다.
정 교수님의 논문, "Tansversality and the Philosophical Politics of Multiculturalism in the Age of Globalization"을 보면 트랜스버셀러티를 다중문화의 관점에서 보고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문화적 특성은 한가지로 정의할 수 없고, 중첩돼 있음을 주장하는 멀티컬쳐럴리즘은 드 보노(de Bono)의 생각에서 그 핵심을 볼 수 있습니다. "It may by likened to the lateral movement of digging a new hole, instead of digging the same hole deeper and deeper with no exit in sight." 생각의 전환을 찾자면 한가지 구멍만 깊게 판다고 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빠져나갈 구멍도 찾지 못한다...
훗설의 현상학보다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선호하는 이유로는 하이데거만이 Inter-subjectivity를 설명할 수 있는 근거를 댄다고 합니다. 어려운 말인데요. 한자로 인간을 나타낼 때, 人間이라고 하죠. 엄밀하게 말한다면, 인간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을 때만 인간이라는 주장입니다. 인간은 Being이 아니라 Inter-being이라는 것, 이런 개념을 하이데거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고 하는데...
하여튼, 선생의 사상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말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선생에게 논문이나 책을 쓸 때, Footnote(각주)는 아주 중요한데, 일례로 통상 600-700개의 각주를 책 한권 쓸 때 집어넣는다고 합니다. 이유는?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같은 생각을 갖고, 함께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지 보여주기 위해서랍니다. 일종의 '운동 그룹'을 명명하신다고 할까요. 세상을 바꾸는 힘을 각주를 통해 보여주신다고 할까요...
하나 더 첨가한다면, 번역의 중요성을 돌아와서...선생에게 계몽주의를 뜻하는 enlightenment는 일방적인 냄새가 나서, 영어로 awakening으로 바꿔 표현한다고 합니다. 스스로의 생각에 따라 단어의 정의도 달리하는 그 힘이 존경스럽습니다.
비교철학회에서 선생님의 책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What is traditionally called "comparative philosohphy" is not just a neglected branch of philosophy, but it is poised to trasform radically the very conception of philosophy itself." 사변 중심의, 옛것에만 머물러 있는, 철학의 세태를 꼬집는 말로 읽힙니다.

Posted by ohn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