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범죄자들은 누구인가. 왜 범죄를 저지르는가. 이들은 악인(惡人)인가. 우리 사회는 아직 어둠의 세계에 사는 범죄자를 정면으로 바라본 적이 없다. 쳐다보는 것조차 무섭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가둘 수 있어도 죄는 가둘 수 없다. 죄의 ‘싹’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어디선가 또 다른 범죄가 일어난다. 한국 사회의 그늘과 우리의 자화상.
강덕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범죄심리과 과장
-어렸을 때 가장 기억나는 것은 무엇인가요.
“캄캄한 밤에 대문 앞 쓰레기통 옆에서 누나 손을 잡고 엄마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어디 가셨나요.
“교회에 가셨어요.”
-기다리다가 안 오면 어떻게 합니까.
“그냥 굶고 잡니다.”
몇 년 전 서울에서 여자 셋을 강간한 뒤 목을 졸라 살인한 H씨. 교도소에서 마주 앉은 그는 20대 중반, 훤칠한 키 그리고 여자에게 꽤 인기를 얻을 법한 호남 형이었다. 직업은 레스토랑 웨이터. 아버지는 청소부였고 성실하게 일한 덕분에 2층집을 지었으며 두 남매를 키웠다. 이런 것만 보자면 그는 평범하게 자랐을 법 했다.
문제는 그의 어머니였다. 교회 활동에 과도하게 몰두하다보니 아이들이 정작 필요할 때 없었다. 두 남매는 어머니를 기다리다 지치면 밥도 굶고 잤다. 이런 생활이 반복되면서 H의 마음속에 ‘공허감’이 쌓여갔다. 우울증은 약물로 어느 정도 치료가 된다고 하지만 공허감은 약물로도 치유할 수 없다. 신체는 건강했지만, 마음은 유약했던 H의 어린 시절은 반복된 공허감으로 가득 찼다. 어머니가 없는 자리에 대신 들어간 것은 여자에 대한 증오심이었고 그 뿌리는 깊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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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중학교 때부터 이상한 행동을 자주 했다고 한다. 여자 친구를 잘 사귀면서도 끝은 좋지 않았다. 늘 이들의 소지품을 빼앗거나 훔쳤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모은 여자 용품이 그가 살던 옥탑 방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부모가 정신병원 치료를 권유했고, 스스로도 이상했던지 순순히 부모의 뜻을 따랐다. 진단 결과 병명은 경계성 인격 장애(Borderline Disorder). 이 같은 성격 장애의 특징은 혼자 있으면 외롭고, 그렇다고 사람들 속에 있어도 이들과 가까워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성을 괴롭히는 것에서 묘한 희열감을 맛 본 그는 한 발짝 더 나아갔다. 그는 자신이 살던 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한 옥탑 방에 무단으로 침입했다. 그곳에서 살던 자매를 성폭행 한뒤 언니를 죽였고, 동생마저 죽이려고 했으나 도망가는 통에 놓쳤다. 그 뒤 또 다른 희생자를 찾아 나선 그는 두 명의 여성을 똑같은 방식으로 죽이고, 이번엔 증거를 없애기 위해 방화까지 저질렀다.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소중한 존재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죽었다면 아이들은 아예 단념하고 산다. 하지만 있다가 사라진 경우는 심각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다. 청주에서 있었던 엽기적인 살인 사건의 주인공 역시 그랬다. 직접 만나 들어본 어린 시절의 얘기는 다른 범죄자와 다를 바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버리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런 어머니 대신 계모가 들어왔으나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혹독하게 유년 시절을 보냈다. 이 때문에 그의 마음속엔 여자에 대한 분노가 쌓였고 결국 여성을 상대로 범죄를 저질렀던 것이다.
이들의 심정을 조금이라고 이해하려면 고아원에 가보면 된다. “엄마가 보고 싶다”며 울부짖는 모습에서 나는 때때로 이들의 미래가 그려져서 섬뜩해진다. 이들의 호소는 평범하게 볼 것이 아니다. 그저 ‘엄마’가 보고 싶다는 뜻, 그 이상이다. 다른 언어로 표현하지 못할 뿐이지 엄마를 부르짖는 것은 뼈에 사무친 절규와 같다.
서구 사회를 보면 우리보다 훨씬 가정적인 것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우리처럼 담은 없지만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곳곳이 방문으로 막혀 있다. 자기 방으로 들어가면 그 걸로 관계가 단절된다.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과 딸이 만나는 계기가 많지 않다. 그러다보니 다른 사람과 사귀는 것보다 자기 내면으로 침잠하기 좋아하고, 우울증에 시달리거나 정신적인 문제를 호소하기도 한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가 많지 않은가.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엽기적 범죄도 많이 벌어진다. 희대의 살인마를 영화로 다룬 ‘양들의 침묵’을 봐라. 우리 사회에선 벌어지기 힘든 범죄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삶의 구조가 주요한 원인 중 하나다.
도처에 경계성 인격 장애자들
과거 우리 사회의 모습을 돌이켜보자. 담은 있지만, 그렇게 높지 않았다. 까치발을 떼면 앞마당이 보일 정도다. 바람막이도 되고 낯선 사람도 막는 정도의 높이다. 담이 있다고 해도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방과 방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가족끼리 서로 부딪치는 일이 잦다. 아버지가 아들의 얼굴을 자주 보면 할 말도 많아진다. 서로 간섭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사회성을 배운다.
이런 환경에서 태어나 자라면 어른이 돼서도 크게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술에 만취해도 집에 들어가려면 부모의 얼굴을 봐야 한다. 그러니 어떻게 술 마신 티를 내겠는가.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게 된다. 이처럼 외적으로 막혀있는 듯 보여도 내적으로는 열려있는 구조가 전통적인 한국의 집이다.
안타깝게도 이제는 이런 모습을 찾기 힘들다. 우리가 서구 사회를 쫓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자녀들 방에 TV, 전화기 등 없는 것이 없다. 굳이 TV를 보려고 거실로 나오지 않아도 된다. 휴대폰으로 전화하기 때문에 친구들끼리 무슨 얘기를 하는지 부모는 알 길이 없다. 예전엔 그렇지 않았다. 친구 집에 전화를 걸면 아버지나 어머니를 거쳐야 했다. 이런 것이 모두 사회성을 기르는 요인이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풍경이 됐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서구 사회는 우리와 달리 과거로 돌아가려고 노력 중이란 사실이다. 회사로 출근하던 어머니가 전업주부로 돌아가고 있으며, 일에만 몰두하던 아버지도 가정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미 해체된 가정을 경험하고, 이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의 경험에서 배우지 못한 채 이들의 과거를 그저 따라가고 있다.
H씨 때문에 애꿎은 세 명의 여자가 희생됐다. H의 책임을 물으면 이것으로 끝나는 것일까. 엄밀히 말한다면 H는 범죄의 구성요건을 충족시켜 범죄자가 됐을 뿐이다. 규범적으로, 도의적으로 보면 H의 어머니도 범죄자다. 가정을 소홀히 한 결과, 아들이 정상적으로 자라나지 못했고, 그 결과 세 명의 목숨이 희생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H를 가두는 것으로 끝나는가.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는 경계성 인격 장애는 정신병은 아니다. 일종의 성격장애인데, 어느 대학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국내 대학생 중 상당수가 이 같은 성격 장애의 징후가 보이며, 남학생보다 여학생이 더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유 없이 불을 지르는 방화범 중에도 상당수가 경계성 인격 장애자들이다. 무서운 것은 정신병자가 아니기 때문에 병원에 수용할 수도 없다는 점이다. 사고를 칠 때까지는 누구도 이들의 변화를 눈치 챌 수 없는 것이다. 또 다른 H가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는 얘기다.
“밥 한 그릇이면 되는데…”
요즘 학생들에게서 이 같은 조짐이 발견되는 이유는 가정의 해체와 관련이 깊다. 예전엔 부모가 이혼하면 서로 아이들을 데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서로 떠맡긴다. 아이들을 맡아도 위탁시설에 보내고 거의 방치하기 때문에 어렸을 때 채워야 할 부모의 사랑이 결핍돼 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아이들은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성장한 아이들은 심한 경우, 우울증에 빠져 자살 하거나, 가슴 속의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게 된다.
물론 H의 죄를 옹호하자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모든 여성이 이젠 회사를 나와 모두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요즘 맞벌이 하지 않으면 집 한 칸 마련하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집에만 있겠는가. 그러나 아이들에게 어머니는 위급하면 언제라도 볼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 요즘 직장은 곁에 유아원을 둬 아이를 맡기고 일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어머니는 아이에게 정서적 안정을 줄 수 있다. 쉬는 시간이면 달려와 아이의 얼굴을 본다면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범죄자와 일반인의 차이는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다. 범죄자가 되기까지 수많은 요인이 축적됐지만, 그 경계선을 넘는 것은 누구라도 가능하다. 전북 익산에서 네 명을 살인한 B씨의 사례가 그랬다. 그는 사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인 흉악범이었다. 한 언론사의 국장이 B씨에게 희생돼 크게 부각되기도 했던 사건이었다. 그를 처음 만났던 날, 얼굴을 힐끔 쳐다보니 잔뜩 찌푸린 얼굴이, 한 눈에도 불만으로 가득 차 보였다. 몸집은 얼마나 크던지, 찌푸린 얼굴이 더 커 보였다. 나를 쳐다본 그는 이렇게 입을 뗐다.
“뭐야?”
-(나는 공손하게) 전국의 범죄자를 만나 죄의 원인을 파악하는 국과수 직원입니다.
“딱 5분만 줄 테니, 5분 안에 끝내고 돌아가. 나 오늘 굉장히 피곤하다.”
그는 내 눈을 빤히 쳐다봤다. 나도 지지 않고 그의 눈을 진지하게 응시했다. 그러더니 그는 고개를 떨어뜨리며 “밥 한 그릇이면 되는데…” 하며 한 숨을 내쉬었다. 나는 이 때를 놓치지 않았다. 나는 “당신의 그 말, 밥 한 그릇이면 됐을 것이란 한 마디에 당신의 모든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그가 한 말의 의미를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스님들의 선문답처럼 부자나 가난한 자나 똑같이 밥 한 그릇을 먹고 산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쓸 데 없는 욕심 때문에 죄를 저질렀다고 나에게 고백하는 셈이었다. 나는 더 이상은 그 뜻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묻지도 않았는데, 그의 과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를 길거리에서 만났다면 흉금을 털어놓고 술 한 잔 하고 싶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성격은 소탈했고, 인상도 좋았다. 게다가 유머 감각도 풍부했다. 그런 그가 살인까지 저질렀던 것은 중학교 때 당한 교통사고 때문이었다. 이 사고로 왼팔을 전혀 쓰지 못하자 그는 희망을 잃어버렸다. 이 때문에 열등의식을 갖게 되었고,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됐다. 무기력이 누적되면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데, 그가 그랬다. 술 마시고, 툭하면 곁에 있는 사람들과 싸우면서 그는 서서히 자포자기 상태에 빠졌다. 가족들마저 그를 인간 취급하지 않자 그는 더욱 삐뚤어졌고, 급기야 친구와 함께 강도로 돌변했다.
그의 이야기를 다 들은 뒤 나는 내 주소를 알려주었다. 그때부터 그는 나를 꼬박 형님이라고 부르면서 편지를 보내왔다. 그가 보내온 두 번째 편지에 답장을 할 때, 나는 “밥 한 그릇이면 되는데”라는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 물어보았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로부터 직접 듣고 싶었다. 그러자 그는 놀라운 얘기를 털어놓았다. 네 명을 죽이고, 다섯 번째 희생자를 찾기 위해 어느 시골을 찾아간 그는 한 노부부가 사는 집을 찾았다. 할머니는 마침 집에 없었다. 할아버지에게 담배 한 개비를 청하면서 그는 속으로 ‘어떻게 하면 이 노인을 죽이고 물건을 도둑질해서 나갈까’를 궁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그 노인은 “밥 한 그릇이면 되는데” 하며 혀를 차는 것이었다. 그냥 스치고 지나갈 법한 말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말이 그의 귀에 꽂혔다. 순간, ‘그렇지. 밥 한 그릇이면 되는데,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밥 한 그릇은 먹을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B씨는 노인에게 물었다. “영감님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러자 그 노인은 “세상 돌아가는 꼴을 봐. 뭣 때문에 다투는지 이해가 안돼서 그래”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툭 내뱉었다. 결국 그는 그 한마디에 마음을 돌렸고, 그 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B씨는 이 말을 가슴에 묻어두고 더 이상 살인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와 만난 날 그가 이 말을 중얼거렸던 것이다.
치정과 돈 그리고 원한
사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인 그는 나에게 종종 편지를 보낸다. 중학교만 졸업했는데도 글 솜씨가 뛰어나다. 최근에 그는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 “제 인생에 다섯 번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처음은 덕지 형님으로 인한 변화였고, 둘째는 함께 복역 중인 스님으로 인한 변화였습니다. 세 번째는 나를 모함한 동료로부터 변화가 왔고, 네 번째는 사승(師僧)으로부터 그리고 다섯 번째는 불교를 함께 공부하는 외부의 한 지인으로부터 변화입니다.” 편지를 읽어보니 그에게 이젠 제법 여유가 느껴진다. 사실 그와 가볍게 주고받은 편지로도 그는 상당히 교화되고 있었다. 교화가 거창한 것은 아니다. 진심으로 귀를 열고 들어주면 대부분의 범죄자는 마음을 열고 과거를 뉘우친다.
이렇듯 순진했던 사람이 무서운 살인자로 넘어가는 ‘경계’는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 그건 알고 보면 너무 간단하다. 사실 범죄자들을 만나 얘기를 들어보면 계획적인 살인자는 흔치 않다. 치정(癡情)에 얽혀있거나 돈 관계가 복잡했거나 원한 관계가 아니라면 사람은 계획적으로 살인하지 않는다. 대부분 우발적인 사건이 많다. B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칼을 들이대고 돈을 빼앗을 당시, 사람을 죽일 의도는 없었다. 그러나 상대가 저항하자 그는 위협을 느꼈다. 칼은 자신에게 있었지만, 한 팔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점 때문에 그는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꼈다. 이 때문에 칼을 휘둘렀던 것이다.
살인자를 만나보면 대부분 체구가 왜소하고 얼굴은 유약하게 생겼다. 아무리 칼을 들었다고 해도 상대의 체구가 왜소하면 당하는 사람은 반항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실수다. 궁지에 몰린 사람일수록 더욱 난폭해지는 법이다. 칼을 든 사람이 가해자지만, 상대가 반항할 경우 여지없이 칼을 휘두른다. 강도와 살인은 엄청난 차이다. 살인 사건이 발생하면 수사본부가 설치되고 수사요원이 집중 배치된다.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것이다. 어떤 강도라도 이런 상황에 직면하는 것은 원치 않을 것이다. 이 때문에 우발적 살인을 저지른 범인은 백이면 백 모두 후회한다.
3년 전 부산에서 8명을 죽이고, 9명에게 중경상을 입힌 J씨도 체구가 왜소한 사람이었다. 그도 부모를 잘 만났더라면 그렇게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어린 J를 고아원에 맡겨놓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체구가 왜소해 그는 고아원 친구들로부터 매를 맞았고 따돌림을 당했다. 이를 견디지 못한 그는 고아원을 도망치듯 나왔고, 생존을 위해 도둑질을 배웠다.
방화한 뒤 집주인을 부르는 K씨
늘 약자의 입장에서 산 탓에 그는 방어용 칼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이것도 불안해 그는 칼을 넣어둔 호주머니에 오른 손을 넣고 다녔다. 여차하면 칼을 꺼내들 생각에서였다. 이를 수상하게 생각한 한 방범대원이 그를 막아섰고, 호주머니를 만져보니 칼 같은 것이 손에 잡혔다. 불안했던 J는 칼을 꺼내들었고, 방범대원을 찔렀다. 이렇게 해서 살인이 시작됐고, 연이어 희생자가 발생했다.
부산에서 만난 J는 첫 인상부터 좋지 않았다. 사람의 인상은 평소에 쌓인 감정이 축적된 결과다. 찌들어서 산 사람은 그 모습대로 인상이 맺힌다. 인상이 좋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멀리하게 된다. 그러면서 이 사람은 사회 밖으로 격리된다. 격리되면서 대화의 상대가 사라지고, 가슴에 쌓아둔 응어리를 풀지 못하면서 삐뚤어지게 된다. 이들과 비교하면 지금 대화할 상대가 있는 사람은 행복한 인생이다.
올해 초 서대문에서 검거된 방화범을 만나면서 나는 사람에게 대화의 상대가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지, 사람끼리 서로 격려하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닫게 됐다. 서대문 방화범 K의 나이는 35세, 직업은 없었다. 어렸을 때 부모가 죽고 외갓집에서 자란 K는 10대 시절, 가출해 여기저기 떠돌면서 살았다. 이렇다할 직업이 없어 주위에 친구가 없었고,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술을 마시고 남의 집에 불을 질렀다. 처음엔 장난삼아 불을 놓았는데, 생각보다 불길이 커져 덜컥 겁이 났다. 순간, 불을 꺼야 한다는 생각에 집 주인을 불렀고 다행히 불을 끌 수 있었다. 그런데, 웬걸 전후사정을 몰랐던 주인은 그에게 “고맙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여태껏 들어보지 못한 감사의 말에 그는 흥분했다. 기분도 좋아졌다. 늘 천덕꾸러기로 자란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는 그를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때부터 그는 불을 지른 뒤 주인을 불렀다. 그리곤 고맙다는 인사말을 들었다. 이 말이 듣고 싶어서 K는 여기저기 불을 놓았다. 범죄자가 살았던 궤적을 추적해보면 K처럼 “고맙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K는 다른 사람과 이야기 하고 싶었고, 방화는 그에게 대화 상대는 물론 칭찬까지 듣게 해준 매개체였다.
나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모든 종류의 언론 매체를 읽고 본다. 그러나 어느 매체에서도 범죄자의 심리나 범죄의 원인을 파고드는 기사를 보지 못했다. 어떤 죄를 저질러 범죄자가 됐다는 설명은 있어도 무슨 이유로 범죄를 저질렀는지 분석한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범죄자를 취조하는 형사들은 범죄 사실을 밝혀내는데 주력하기 때문에 그의 심리 상태나 어린 시절의 아픔 같은 것은 물어보지 않는다. 범죄자도 어떻게든 범죄의 사실을 숨겨야 하기 때문에 굳이 속을 털어놓지 않는다. 언론사 기자도 마찬가지다. 범죄자에게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제한돼 있기 때문에 형사들의 수사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수많은 범죄가 일어나고 있지만, 원인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는 사람도 없고, 그런 시스템도 없다.
미치도록 일하고 싶었던 살인자
그러나 지난 6년 동안 직접 범죄자를 만나보니 우리 사회가 공유해야 할 진실이 너무도 많았다. 때론 범죄의 진실이 왜곡되기도 하고, 지엽적인 이유가 마치 본질인양 부각되기도 했다. 우린 이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 이들이 털어놓는 진실을 함께 나눠야 우리가 피해자가 되지 않는다. 알고 싶지 않다고 없어지는 세계가 아니다. 범죄는 TV 뉴스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가족이, 친족이, 친구가 언젠가 당할 수 있는 것이다.
몇 년 전 인천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의 주범 L씨. 살인을 저지르기 전 그는 어느 쇠 가공 공장에서 착실하게 일한 청년이었다. 한두 번 교도소를 들락거렸지만 그는 성인이 되면서 모범수로 변화됐고, 출소한 뒤엔 자신의 힘으로 일어서려고 열심히 일했다. 워낙 열심히 일한 덕분에 그는 회사 사장의 배려로 회사 기숙사에서 거주하면서 일하는 특혜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 한 가지 약점이 있었다. 어깨에 새겨놓은 문신이었다. 혹시 이를 본 공장 동료들이 그의 과거를 알게 되지 않을까 염려해 그는 더운 여름에도 긴 팔을 입고 다녔다.
무더위가 절정에 달했던 어느 여름, 그는 주위에 아무도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옷을 벗었다. 러닝셔츠만 입고 세수하던 그를 우연히 목격한 공장 아주머니는 그의 어깨에 새겨진 문신을 발견하고 사장에게 귀띔을 해주었다. 이에 놀란 사장은 그를 불렀고, 자초지종을 묻자 그는 순순히 과거를 털어놓았다. 결국, 그는 회사에서 나가야 했다.
보통 사람의 생각으론 과거를 숨기고 다른 공장에 취직하면 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어렵게 시작한 일이었고, 인생에서 처음으로 재미를 느끼고 노력을 인정받은 그가 느꼈던 좌절감은 상상할 수 없다. 이런 경우 다시 일어나기는 불가능하다. L은 회사에서 쫓겨난 뒤 여인숙을 전전하면서 생활했고, 돈이 떨어지자 다시 도둑질을 했으며 살인까지 하게 됐다.
그들도 우리 이웃이다
이 세상엔 악인도 없고 선인도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상황에 따라, 판단 기준에 따라 선인도 되고 악인도 된다. 죄를 지은 사람을 악인으로 내몰고 사회적으로 격리시키면 이들은 영원히 악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들을 만나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주면 그들은 눈물을 흘린다. 처음 보는 나에게 정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제일 안타까운 것이 뻔히 알면서도 이들을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성질환은 고치기 어렵듯 이들의 병은 어렸을 때부터 형성된 것이어서 치료하기가 쉽지 않다. 그만큼 장기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들의 시선을 똑바로 보고 진심에서 우러나는 말을 해줘야 한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따스한 사랑이다.
이들을 동정하는 것도 아니고, 미화시키는 것도 아니다. 같은 인간으로서 똑바로 바라보자는 말이다. 이들이 언젠가는 다시 범죄를 저지를 것으로 예단해서는 안 된다. 이들은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을 가까이 하려고 하다가도, 상대가 경계하는 기미를 보이면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경북 칠곡에 가면 사심 없이 범죄자들을 돌보는 신부님이 살고 있다. 그는 오갈 데 없는 이들과 함께 일하고 함께 잔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새 출발하고 있다. 이들과 함께 살아가려면 우리가 먼저 따뜻한 인간이 돼야 한다.
Posted by ohnu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