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양천 허씨와 인연이 좀 있다.
긴밀한 인연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겠다.
처가가 허가이니까.
대학 때 읽은 허준의 동의보감(작고한 김은성씨 저)을 읽고 직접 서울 양천구에 있는 생가에도 찾아가 본 적이 있다.
지금은 허준의 생가가 복원돼 있지만,
90년 대 초만 해도 아무 것도 없었다. 그곳을 물어 물어 찾아간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허목 선생은 양천 허씨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조상이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논문과 책을 몇 권 뒤적거렸는데 조선시대에 이런 인물이 있었다는 게 놀라울 정도다.
허목 선생은 예송논쟁 당시, 우암 송시열과 한 판 붙은 인물로 알려져 있을 뿐, 그의 사상에 관해 별로 알려진 것이 없는데, 최근 학자들이 그에 관한 연구 논문을 펴내 조금씩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허목 선생은 조선 시대, 미래학자였다. 주역에 통달했고, 미래를 대비할 줄 알았다. 그가 동해안에 큰 해일이 닥칠 줄 알고, 비석을 세워 재앙을 막았다는 전설같은 얘기는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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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우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의 논문 '허목의 고학과 역사의식'은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다.
그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허목은 조선시대 도가의 맥을 잇는다. 그의 부친이 박지화의 문화생이었다. 조선시대 도가의 계보는, 김시습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세 파로 나뉜다. 이렇게.
ㅣ-홍유손
김시습 ㅣ-정희량-대주(승) ㅣ-박지화
ㅣ ㅣ-정렴-정작
ㅣ -윤희평-곽지허-한무외
박지화는 화담 서경덕의 제자다. 허목은 이같은 영향을 받아 노자를 숭상하고, 노장적 세계관이 짙은 사람들을 좋아했다. 그 역시 도인처럼 살았다. 56세에 벼슬을 시작하기 전까지 세상을 주유하며 살았다. (멋있다. 늦게 출발하고도 영의정까지 지냈으니...)
허목이 알려진 것은 효종 때 시작된, 벌호정책(청나라를 치자는 것)과 복상(1년 상을 할 것이냐, 3년상을 치를 것이냐)문제 때문이다. 그는 강력한 왕권을 바라는 마음에서 3년상을 주장했고(왕권강화), 군비확장으로 민생이 파탄나는 것을 우려해 벌호정책을 반대했다. 그가 전쟁을 반대한 이유가 재미있다. "조선은 나라가 작고, 병은 적으며, 풍속이 순박해 지키는 것은 잘하지만 공격은 잘 하지 못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말년에 역사책을 한 권 썼는데, 그게 동사(東事)다. 이 책에 그의 역사관이 잘 나타나 있다.
"단군은 순방한 정치를 했고, 기자는 팔정을 가르쳐 각각 천년을 누렸습니다. 위만은 병사와 재물로 수천리의 땅을 개척했으나, 갑자기 얻고 갑자기 망했습니다. 고구려는 강대한 정치로써 700년을 누렸습니다. 백제는 강폭하고 싸움을 좋아해 전사한 임금이 넷이나 되며, 임금과 나라가 또한 망했습니다. 신라는 충후한 정치로 인의의 나라로 불렸으며, 전국이 58대에 이릅니다. 대체로 열국의 정치는 선악, 치란, 흥망이 있어 후세 사람들이 권하고 경계할 바가 하나가 아닙니다."
단순한 단어로 일국의 역사를 개괄하는 솜씨가 과연 비범하다. 허목 선생은 칭송 받아야 할 나라로, 단군-기자-신라를 꼽았고, 경계해야 할 나라는 위만-백제를 꼽았다. 그가 판단하는 기준은 주로 전쟁을 좋아했느냐 안 하느냐이다. 전쟁을 통해 부강을 추구한 나라는 국시가 오래가지 못했다.
허목 선생은 우리나라의 풍토적 조건, 그 풍토에 맞춰 형성된 농업조건, 인심, 풍속, 그리고 역사를 헤아려 그에 순응하는 정치를 행하는 것이 위국, 안민의 요체라는 점을 동사에서 적고 있다. 허목은 우리나라 풍속의 특색이 검색하고 예양을 좋아한다는 것, 지방적 특색에 따라 세금을 거둬여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현실에 기반을 둔 정치인 것이다.
허목 선생은 특히 기자조선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데, 기자의 교화 때문에 도둑이 없고, 부인들이 정숙했으며 천여년 동안 나라가 이어진 것은 중국 삼대(三代)에도 없던 일이라고 주장한다. 기자조선은 928년 동안 치세를 누렸으며, 기준왕이 금마에 내려가 마한왕이 되어 전후 1120년의 역사를 가졌다고 본다. 마한이 백제에 망한 후 기자 후손은 기시, 한씨, 선우씨로 되었다고 한다. 이같은 설은 허목 선생에 의해 기정사실화 된다.
한국 민족주의 사학의 확립자인 단재 신채호 선생은 허목의 동사를 두고 "선조 인조 이후에는 유교계에 철학, 문학의 거사가 배출해 사학계도 차차 진보되어 허목의 단군, 신라 등 명세기가 너무 간략하나 왕왕 독득의 견이 있다"고 평가했다. 그의 사학이 매우 독창적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근대민족주의 학자들은 선교 혹은 도교를 한국 민족주의 원류로 간주하는데, 허목은 바로 그 계열에 속하는 인물인 것이다.
사진은 허목 선생이 공부했다는 미수 서원. 미수는 그의 호다.

Posted by ohn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