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Pimm-Partial immortalization)

로버트 란자(Robert Lanza)를 아십니까.
약력:
-a vice president of research and scientific development at Advanced Cell Technology.
-a professor at Wake Forest University School of Medicine.
-written 20 scientific books and won a Rave award for medicine from Weird magazine and an "all star" award for biotechnology form Mass High Tech:The Journal of New England Technology

번역하는게 번거롭고 또 번역해봐야 엉터리일테니, 그냥 영어로 올립니다.
쉽게 말하면 요즘 뜨는 생물학자라고 할 텐데요.
지난해 3월 American Scholar에 쓴 논문 한 편이 제 눈을 확 끌었습니다.
제목은 이렇습니다. A new theory of the universe: biocentrism builds on quantum physics by putting life into the equation.
제목의 마지막 말에 주목해주세요...
by putting life into the equation!!!(생명을 수학공식에 넣다!!!)
수식에 생명을 넣다니요? 이게 뭔 말일까요?
그의 기본 철학은 모든 생명엔 의식이 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물론 단세포든 고양이든.
따라서 모든 생명의 주관적인 경험을, 쉽게 말해 모든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
생명중심주의 Biocentrism이라는 겁니다.
돌에도 의식이 있다고 믿는 동양적 사고방식으론 별로 새로울 것도 없어 보이지만,
다음의 그의 말은 곱씹어볼만 합니다.

Most of these comprehensive theories are no more than stories that fail to take into account one crucial factor: we are creating them. It is the biological creature that makes observations, names what it observes, and creates stories.

우리는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창조하고 있다는 말...제가 얼마 전에 펴낸 책 "H그룹 직장영웅전설"에서 쓴 적이 있는데, 란자 박사도 우리는 창조하고 있다는 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창조하고 있기 때문에, 창조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인간이나 단세포 동물이나 끝없이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과학의 힘으로 모든 세계를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고 믿고 있지만, 생물중심주의 시각에선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다 주관적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의식은 끝없이 실제를 재단하고, 재창조한다는 점에서그렇습니다.

란자의 설명을 듣고 있으면 객관적 진리는 없다는 주장처럼 들립니다. 콩트의 실증주의를 넘어서 현대에 상대주의가 실제를 탐구하는 방법으로 자리를 잡았듯, 란자의 얘기는 생명을 뺀 과학적 탐구는, 즉 생명의 연속성을 고려하지 않은 과학적 사실은 단편적임을 지적합니다. 하이젠버그의 불확정성원리가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알아낼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듯, 하나가 들어가면(if one comes out) 또다른 하나가 빠져나오는(the other goes in) 모순을 현대의 과학은 막아낼 수 없습니다.

그럼 우리가 진리임을 믿고 있는 진실은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까요. 그것이 진리임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하이젠베르그(Heisenberg)는 계속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A path comes into existence only when you observe it." 존 휠러(John Wheeler)는 급기야 관찰할 수 없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했습니다. "No phonomenon is a real phenomenon until it is an observed pheonomenon." (대부분 아시는 얘기지만, 이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태양을 볼 수 없다고 태양이 없다고 말하는 건, 웃기는 말이라고 꼬집은 바 있습니다.)

그러나 란자는 관찰하는 사람의 의식이 중요하다는 자신의 주장을 계속 고집합니다. 란자는 유진 위그너(Eugene Wigner)의 말을 빌려 관찰자의 의식을 빼놓고는 법칙을 만들 수 없다고 말합니다. "It is impossible to formulate the laws of physics in a fully consistent way without reference to the consciousness of the observer." 쉽게 말하면 부엌에 들어갈 때, 안방의 세계는 사라지는 겁니다. 부엌에서 화장실로 이동할 때, 부엌의 세계는 사라지는 겁니다. 란자는 확신에 찬 어조로 이렇게 말합니다. "Everything outside your range of perception does not exist."

그래도 과학의 법칙은 존중되어야 한다거나 혹은 과학적 법칙만이 유일한 진실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란자는 죽음에서 새 생명이 태어나는 현상을 과학은 죽었다 깨어나도 법칙으로 증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한 번의 빅뱅에서 우주가 태어났다면, 그것이 다시는 일어날 수 없는 것이라면, 딱 한 번의 실수를 용납하고, 나머지 것들만 과학적 법칙으로 밝힐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태어난 사실, 여기에 이렇게 버젓이 살아있는 실재를 딱 한 번의 실수라고 용납하는 건, 가장 중요한 사실을 밝히지 못하는 과학의 한계를 증명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과학이 궁극적으로 설명해야 할 것은...따라서 생명이며, 의식입니다. 그러나 란자의 생명중심주의도 생명(의식)을 물리공식에 넣어야 하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하는 건지는 설명하지 못합니다.

이걸 설명하는 공식 혹은 방법은 없을까요? 제가 보기엔 어느 곳에서는 이미 이런 작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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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ohnul

2008/09/25 03:46 2008/09/25 0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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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삼족오 2008/09/24 10:57 # M/D Reply Permalink

    생명윤리학(환경윤리)의 주테마!!
    : Paul Tayler 한번 참조해보시오.

    테일러의 주장은 모든 생물에 존재하는 의식을
    인간의 관점으로 본다는 것.
    이는 다름아닌 인간중심주의, 개체주의요.

    삼족오 별걸 다 참견하다. 쿨럭~

    과도한 비약의 키워드 : 기일원론, 화엄경의 일체유심조!

  2. 미래도둑 2008/09/25 04:47 # M/D Reply Permalink

    서강대 생명문화연구원 한면희 선생은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 생태 중심의 전체론적 접근을 권하고 있습니다. 한 선생에게 자연 중심주의 또는 생태 중심주의는 "자연이나 생태계 보전에 대단히 유리하지만 인간의 지위를 부차적으로 전락시키거나 인간의 문화적 생활 자체를 부정하는 단계로 이행하게 만들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라는군요. 서양에선 유기체 전일론을 대안이라고 주장하지만, 한 선생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합니다.
    "생명 실체로서의 유기체 전일론은 지구나 생태계를 생명 실체로 보거나 그렇게 보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지구나 생태계 보호에 탁월하지만, 상대적으로 지구 구성원 및 인간의 자율성과 그런 존재들 간의 관계성을 무시하기 쉽다. 그런데 서양의 전체론이 이런 방향으로 흐르는 것은 그리스의 가이아(Gaia) 신화나 스피노자(Spinoza)의 범신론 전통 때문이다. 이런 입장에 서게 될 때 전일론적 생명체에 대한 존중은 분명해지지만 그 구성원인 인간과 자연적 존재의 생명에 대해서는 간과하기 쉽다. 그렇다고 개체론적 환경윤리로 이행하면 개체 생명 존중에 대단히 유리하지만 지구나 생태계, 집합 개념으로서 멸종에 처한 종 보전에는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한 선생은 동북아의 전통으로 이런 딜레마를 풀려고 합니다.
    "동북아시아에는 양 극단을 피하면서 문제 해결에 다가갈 수 있는 전통이 존재한다. 즉 개체 자율의 유기적 전체론이 존재한다. 그것은 인간의 눈으로 자연을 기의 흐름으로 보는 전통이다. 필자는 이런 전통을 환경위기 극복의 방안으로 발전시켜서 기생태주의(氣生態主義)로 제안을 한 바 있다. 한면희, 『환경윤리』(서울: 철학과현실사, 1997), 5장. 이것은 지구 자연을 생명 실체로 보기보다는 인간을 비롯한 개체 생명체들이 서로 기대어 생명을 유지하는 장(場)으로만 본다."

    족오형이 말씀하신 폴 테일러에 대해 한 선생은 이렇게 평가하는 군요.
    "폴 테일러(Paul Taylor)는 레간과 마찬가지로 의무론적 접근을 취하면서도 슈바이처의 생명외경 사상을 발전시켜서 식물까지도 포괄하는 생물 중심주의(biocentrism)를 주창한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모두가 생명을 유지하려는 목적론적 생명 중심체로서 자체적 좋음을 갖는다. 이에 생물은 인간의 목적 달성을 위한 도구로 머물 수 없는 내재적 가치(inherent worth)를 갖기에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도덕적 의무를 짊어지게 한다고 본다. Paul W. Taylor, Respect for Nature (Princeton, N. J.: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6), p. 75. 그러나 생물 중심주의는 내재적 가치를 지닌 생물을 모두 존중해야 하는 까닭에 인간의 삶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왜냐하면 동물 보호론처럼 채식주의로 갈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체론적 환경윤리 모두에게 공통된 가장 큰 문제는 보전 필요성이 있는 집합 개념으로서의 종과 생태계가 고통을 느끼거나 생활의 주체이거나 또는 살아있지 않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환경 보전을 위한 정책적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이렇게 보니, 제가 란자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드는데요!
    과도한 비약의 키워드는...아주 좋습니다.

  3. 미래도둑 2008/09/25 04:57 # M/D Reply Permalink

    한면희 선생은 일면식도 없지만, 그의 글을 읽으면 뭔가 손에 잡힐 듯한 것이 있군요. 다음의 그의 글 중에서 음기, 양기, 그리고 화기 등 세가지 기가 만물을 낳았다는 대목은 곱씹어볼 만 합니다. 서로 조화하도록 하는 화기...전, 이 화기가 미래학의 역할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동아시아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관계성이 사물과 마찬가지로 실재한다. 동아시아의 전통 의학은 기의 의학이라고 볼 수 있다. 이때 기란 우주 만물의 원인인 도(道)가 자신을 드러내는 형태이다. 노자(老子)에 따르면, 도는 기를 낳고, 기는 음양을 낳는다. 음양은 분별되지만, 음기(陰氣)와 양기(陽氣)로 표현되듯이 기로 이어져 있는데, 그로부터 화기(和氣)가 출현하면서 셋이 어우러져 만물을 낳았다. 따라서 인체에 흐르는 기는 자연으로 온 것이다. 장자(壯子)는 자연을 “기를 호흡하는 거대한 땅덩어리” ꡔ莊子ꡕ 「齊物論」篇 : 大塊噫氣. 라고 표현하면서, 자연에는 기가 퍼져 있고 그리고 인간의 생사도 기의 이합집산으로 파악하였다."
    출처:www.oikozoe.or.kr/bbs/read.cgi?board=data&y_number=26&nnew=1

  4. 미래도둑 2008/09/25 05:09 # M/D Reply Permalink

    오! 이런 표현도 눈에 쏙 들어오는데요. 양자역학의 양자관계를 넘어선 나와 다자의 대화...그것이 '온' 가치라는 군요.

    "캘리콧이 분별한 내재적 가치(intrinsic value)는 인간의 의식적 평가와 무관하게 자연이 객관적으로 갖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인 반면, 고유한 가치는 의식적 평가와 상관적인, 그러나 자연 그 자체를 위해 의미가 있는 종류의 것이다. 그것은 인간 중심적인 것의 소산은 아니지만 인간-기원적(anthropo-genic)인 것은 분명하다.
    온가치도 캘리콧의 고유한 가치와 흡사하게 인간 기원적이다. 초월자를 설정하지 않을 경우, 가치는 어떤 형태로든 의식적 평가에 의존한다고 본다."

    "다만 캘리콧의 고유한 가치는 양자물리학에서 조성된 관찰자 나와 관찰 대상의 상호작용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양자(兩者) 관계에 바탕을 둔 견해인 반면, 필자의 온가치는 나와 나머지 자연적 존재간의 다자(多者) 관계에 바탕을 둔 견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온가치의 다자 관계성은 ‘온’(Onn)이란 언어적 표현의 사용과 관련된다. ‘온’ 개념은 조선시대에 한글 창제 정신을 담은 용비어천가 58장의 ‘온 사람 다리샤’에서 나온 것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할 때, 온 백성이 서로 제각기 역할을 수행하면서 살아가되, 쉬운 우리글을 사용함으로써 서로 기대고 협력하여 생활하도록 배려한 것이다. 따라서 온은 부분들의 단순 합인 ‘모든’의 의미가 아니고, 관계적인 전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온가치는 이런 의미에서 유기적 전체론에 부응한 가치 개념이다."
    (출처는 윗글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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